[Dec 1, 09] VENEZIA 도착

Posted 2009. 12. 22. 23:00

바티칸의 여운도 잠시, 일찍부터 채비하고 베네치아로 향할 준비를 했다.
원래 유로스타를 타고 베네치아에 혼자 가려 했으나, 이모부가 다음날 토리노에서 미팅이 있다고 하여 베네치아까지 데려다 주고, 이모도 같이 가기로 했다.

로마에서 베네치아로 기차로 가든 차로 가든 약 5시간 정도 걸린다. 10시쯤에 출발했으니깐 오후에 도착 예정.
차안에서 계속 여행책자만 보고있으니, 이모부는 책 그만보고 주변 풍경을 즐기라고 하심 :)
휴게소에서 잠시 정차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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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도착.

소설가 뒤마는 베네치아를 죽기 전에 반드시 보아야 하는 도시라고 한다.
베네치아는 수상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원래부터 수상에 지은 것은 아니며, 여러개의 섬들과 다리로 이루어져 동남아의 수상 가옥과는 다르다.
여름에 많이 덥다고들 하는데 초겨울에 가서 그런지 약간은 쓸쓸한 느낌이지만, 날씨가 춥지는 않았다. 가디건을 걸치기엔 살짝 추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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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에는 버스나 지하철이 없어서 주된 교통 수단이 수상 버스(바포레토 Vaporetto) 이다.
이모부가 저녁만 먹고 미팅장소 근처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산타루치아 역 근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여행자 안내소에서 지도를 받은 뒤 산마르코 호텔에 짐을 풀기 위해 수상버스에 올라탔다.

수상버스에서 본 늦은 오후의 베네치아.
곤돌라들이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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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와 다른점은 얻어가려 할수록 얻기 어렵고 얻지 않으려 할 수록 많이 얻을것 같은 도시인듯.

저녁 6시, 바티칸 구경을 마치고, SAXA RUBRA 역에서 6시 40분까지 이모부와 만나기로 했다.
투어가 끝나니 바티칸에는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고, 화장실을 잠깐 다녀오니 함께 역까지 갈 일행들은 이미 뿔뿔이 흗어져 버리고, 나혼자 남아 폭우를 헤치며 지하철 역을 찾아갔다.
가이드에 의하면 오벨리스크에서 분수대 쪽으로 10분을 걸어가면 있다는 전철역은 가도 가도 보이지를 않고, 전화는 밧데리가 거의 다 되어 정말 급박한 순간에 사용하리라 전원을 꺼 놓은 상태. 길은 깜깜해서 누가 나한테 말만 걸어도 화들짝 놀라고 점심때 먹은 피자는 역류할것만 같고 근자에 가장 최악이었다.
지도를 봐도 구별할 수 없는 복잡한 도로들과 절대음감은 있지만 절대는 물론이고 상대 방향감도 없는 나는, 여행 내내  지도보는게 가장 고역스러웠다.
다시는 혼자 모르는 곳에 오지 말아야지라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짐을 했는데. (이는 나중에 베네치아 가서 다 풀어짐.)
다행히 중간에 한국인 여행객들을 만나 함께 전철역을 찾으러 돌아다녀서 마음이 편했지만, 전철역 찾는데만 30분. 약속시간에 30분 이상 늦을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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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에서 SAXA RUBRA로 가려면 OTAVIANO 역에서 전철을 타고, 2정거장 뒤인 FLAMNIO역에서 내려 로마 외곽으로 가는 기차로 환승을 하고 8정거장이 지나면 SAXA RUBRA가 나온다. 로마가 서울이면 SAXA RUBRA는 분당 정도 되겠거니.
그런데 중간 환승역에서 갈아타고 10분을 앉아있어도 출발을 하지 않더니, 일부 사람들이 갑자기 우르르 내리서 옆자리 이탈리아인에게 물어보니 너도 내려서 맞은 편 기차로 갈아타라는 것이다.
어쨌든 갈아탔는데.
역을 알리는 안내방송은 나오지도 않고, 첫 몇구역은 창 밖 간판으로 알아보았으나 몇정거장 지나니 비로 인해 안개가 가득차서 창밖이 전혀 보이지도 않았다.
어쨌든 8 구역이 지나, 옆자리 사람한테 여기가 SAXA RUBRA냐고 물어보니 벌써 한구역 지났으니 이번(LABARO)에서 내려서 돌아가라는 말이.
LABARO라는 지역은 루마니아인들이 사는 빈민가로 범죄가 많은 동네라고 한다.
그런 동네인줄 몰랐다 해도, 사람들의 눈빛이 로마에서 많이 봐오던 여행객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어쨌든 사람들과 눈마주치지 않으려고 또 자세를 웅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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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또 20분을 기다리며 마지막 남은 밧데리를 걱정하는 이모에게 안심의 전화 거는데 사용하고, 내 핸드폰은 전사했다. 이제 한정거장만 가면 되니깐.
SAXA RUBRA에서 이모부와의 조우.
너무 길었던 하루이자 바티칸의 감동이다 뭐다 신라면에 말아먹고 너무 무서운 기분에 소화가 안되었으나, 오늘의 와인을 마시니, LABARO의 무서움은 잊어버리고 다시 바티칸의 감동이 떠올랐다.
겨우 정류장 하나 지나쳤을 뿐인데, 이렇게나 무섭다고 오도방정을 떨다니.
하지만 그 기차는 8시면 끊기고 그 지역이 범죄가 많은 동네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고, 만일 기차라도 끊겼다면 핸드폰도 없이, 서울에서도 타기 무서워 하는 택시를 알지도 못하는 동네에서 어떻게 탔을지.


시스티나 예배당 Sistina

바티칸 박물관의 관람은 이 시스티나를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이곳에서 교황을 뽑는 추기경들의 모임인 콘클라베가 열린다. (영화 천사와 악마 참고)
이 시스티나 예배당이 유명한 이유는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때문이다.
사진을 찍을 수 없어 담아오지는 못했지만, 감동은 내 머릿속에 여전하다. 개인의 한계를 넘어 인간 능력의 극한을 보여주기 때문인데, 힘이 들면 미켈란 젤로의 천장화 엽서를 한번 보고 힘을 내야겠거니.
최근 천장화의 감동을 다시 보고 싶어서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는 프레스코 걸작선 재현전을 보러가기도 했다.
천장화 아래 양 벽에도 당시 르네상스 최고의 화가였던 보티첼리, 기를란다이요, 코시모 로셀리, 시뇨렐리, 라파엘로의 스승이던 움브리아 최고의 화가 페루지노, 핀투리키오 등의 그림도 있다.
30분동안 고개를 들어 천장화를 감상하고, 바티칸 대성당(성 베드로성당)으로 이동.


바티칸 대성당(성 베드로 성당) Basilca di San Pie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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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내부는 1506년 브라만테에 의하여 건축이 시작되어 미켈란젤로, 1600년대의 마데르노에 의해 내부 공사가 계속되어 공식적으로는 1626년에 완성이 되었다.


성 베드로 광장 Piazza San Pie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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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성당 앞의 웅장한 광장으로 알렉산드로 7세 재위 시(1665~1667)에 베르니니가 1667년까지 12년의 공사 기간 동안 완성한 것이다.
천사와 악마에 나온것 처럼 성당 앞에서 여러 종교 의식이 거행된다.
가운데는 오벨리스크가 있는데 전형적인 해시계 역할을 하기 때문에 광장 바닥에는 시간을 나타내는 표시가 있다.


바티칸 성당의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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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 젤로의 <피에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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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이 기억에 남은 이유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보다 이 피에타 때문이다.
한없이 슬프고, 부드러움에 취해 가만히 피에타 상을 바라보고 있으니 눈물이 날 지경이다.

'피에타'라는 말은 보통 돌아가신 예수님을 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을 한 조각이나 그림을 말한다.
아쉽게도 성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는 방탄유리로 보관중이라 가까이 접근하기 힘들었다.
1972년에 어떤 미친 사람이 피에타상의 일부를 부수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지금은 복원 후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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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내내 나와 함께한 몰스킨과 파버카스텔 볼펜 피에타 상 앞에 등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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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여행왔다는 노랑머리 대학생이 사진을 찍어줬다.

대성당의 중심으로 성 베드로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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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성당을 둘러보고 나오니 대략 저녁 6시.
6시 40분까지 나는 Saxa Rubra  역으로 가야한다. 핸드폰은 밧데리가 없다. 잘 도착할 수 있을지...

시스티나 성당으로 가려면 복도를 여러개 지나가야 하는데 각 복도마다 이름이 있다.
촛대의 복도 -> 아라찌의 복도 -> 지도의 복도 를 지나 소비에스키 방을 거치면 라파엘로의 방들에 가게 된다.
그 다음이 시스티나 예배당이다.


촛대의 복도 Gallereria degli Arazzi

아치형의 중간 중간 문바다 양 옆에 촛대 모양의 조각들이 있다. 이 방은 1761년에 만들었고, 로마시대, 헬레니즘, 그리스 시대의 상당히 많은 작품들 (기원 전 3세기에서 1세기경)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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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찌의 복도 Gallereria degli Arazzi

아라찌(Arazzi)는 벽걸이용 융단을 뜻한다.
다음은 조각처럼 보이지만 천장의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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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의 복도

이 복도의 양 벽에는 이탈리아의 지도가 지역별로 그려져 있다.
이 지도들은 '이냐지오 단티'(Ignazio Danti)라는 신부의 지휘 아래 수많은 화가들이 돌아가면서 의무적으로 벽화를 그렸다. 1580~1583년까지 4년동안 작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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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이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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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의 방들

율리우스 2세의 거처로서 율리우스 2세는 라파엘로에게 그림을 그리라 명했다.
따라서 1508~1512년 서명의 방을, 1512~1514년 엘리오도르의 방을, 1514~1517년 보르고 화재의 방, 그리고 마지막으로 1517~1524년 콘스탄티누스의 방에 그림을 그렸다.


서명의 방

이 방은 라파엘로가 제일 처음으로 그림을 그린 방이다. 이 방 안의 <아테네 학당>은 바로 이성을 통한 진리 탐구라는 의미가 있고, 유럽 역사에서 이름을 남긴 쟁쟁한 학자들을 이 그림에 다 모아 놓았다.

아테네 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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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에서 손가락으로 위를 가르키며 나오는 사람이 플라톤인데 얼굴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얼굴이다.
바로 옆은 아리스토텔레스인데 손바닥은 수평이다. 플라톤은 이상론, 아리스토텔레스는 현실론을 뜻한다.
 

보르고 화재의 방 Stanza dell Incendio Borgo

847년 바티칸의 보르고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이 화재를 레오 4세 교황의 강복으로 가볍게 진압했다는 기적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이다.
인물들이 전반적으로 역동적으로 보아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가 천장화를 그리고 있을 당시, 라파엘로 역시 서명의 방을 그리고 있었다. 이 둘은 늘 마주쳤고 라파엘로는 진심으로 미켈란젤로를 존경했다고 한다.

보르고의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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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관 관람을 마치고 잠시 휴식중.

에스프레소에 도전. 나름대로 감내할 만 했다.
다른 친구들은 23살 여자, 27살 남자인 대학생들이었다. 쉬는 시간동안 주변을 둘러보라는데 힘들어하는 우린 앉아서 수다만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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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방울 정원(Cortile della Pig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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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박물관의 유일한 정원.
정원의 정면에 솔방울이 있고 맟은편에 기둥이 있는 누오보 궁전이 있다.
솔방울 위 둥근 돔 형태의 내부 벽감은 판테온을 모방한 것이다.
이 솔방울 조각 양 옆의 계단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으로 중세 건물의 보편적인 양식이다.
바로 앞 사자상은 기원전 4세기 이집트의 작품이다.


아르날도 포모도로의 <'천체 안의 천체'(Sfera con Sfe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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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베데레 궁전 뜰 Cortile Ottagonale

팔각형 형태의 뜰은 피오 클레멘티노 박물관에 포함되는 곳이다.
이 뜰에는 각종 조각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라오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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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라오콘 조각이 부서진 채로 묻힌 곳은 에스퀼리노 언덕이다.  에스퀼리노 언덕은 현재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1506년 1월 14일에 발견되었는데 이 작품을 '라오콘'이라고 정확히 밝혀낸 이유는 '플리니'라는 학자가 쓴 글 때문이다. 그의 글에는 이 라오콘은 로도스 섬의 조각가인 아게산드로스, 아나노도로스, 폴리도로스가 만들었다고 적혀 있어, 원래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라오콘은 실제 그리스 신화 속의 인물이다. 트로이 전쟁 당시 그는 트로이의 제사를 담당하던 사제였다. 그런데 트로이 성에 들어온 목마는 분명히 흉계임이 분명하다고 판단해서 이 목마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아테네는 뱀을 보내 그와 그의 두 아들을 죽였다. 바로 그 장면이 이 조각상.



피오클레멘티노 전시관

교황 클레멘트 14세(1769~1774)와 피오 6세(1775~1799)가 만든 전시관.
그리스 시대의 작품부터 로마를 거처 1800년대까지의 다양한 조각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제 1 전시관- 동물의 방
약동적인 동물들의 조각들이 있다.


제 2 전시관- 뮤즈의 방
뮤즈는 예술과 학문의 여신이다.

토르소 Tor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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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가 가장 좋아했다는 토르소는 제2 전시관 뮤즈의 방에 전시되어 있다.
기원전 1세기 경 아테네의 조각가인 아폴로니오의 작품이다. 이 작품을 기초로 하여 르네상스 시대의 수 많은 조각가들과 신고전주의 조각가들이 그들의 작품을 발전시켰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기본 모델이기도 하며 미켈란젤로의 수 많은 조각의 기본 모델이기도 한다.


제 3 전시관- 원형의 방

이 방이 유명한 이유는 판테온에서 영향을 받아 1780년에 올린 천장의 돔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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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돔의 크기는 21.60m이다.
이 방의 좌우에는 주피터, 안토니우스, 하드리아누스 황제, 헤라, 주노의 상 들이 있다.

헤라클레스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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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스는 항상 몽둥이와 사자 가죽, 황금 사과를 들고 있다.
이 작품은 청동 도금이 된 작품으로 폼페이우스 극장 근처에서 가져왔다.

바닥의 모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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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내용은 그리스 신화에 바탕을 둔 전젱의 모습이다.
이 모자이크는 3세기 작품으로 아주 멀리 움브리아 주으 ㅣ한 온천 바닥에서 뜯어 왔다.
바티칸 구석구석을 다닌 내 운동화도 함께.


제 4 전시관- 그리스 십자가의 방
피오클레멘티노 관의 마지막 방으로 그리스 십자가 모양으로 디자인 되고 1780년에 완공되었다.
두개의 붉은 화강암으로 만든 석관이 있음.


[Nov 30, 09] Vatican City - PINACOTECA

Posted 2009. 12. 21. 00:32
Vatican City

로마 안에는 바티칸이라는 또하나의 국가가 있다.
전체 면적이 0.44Km로 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이다.
하나의 국가이지만 국방은 이탈리아에 위임되어 있고 소수의 스위스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다. 약 100명의 스위스 국적의 젊은 근위병이 입고 있는 화려한 옷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옷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라파엘로의 <아테네학당>등 훌륭한 예술 작품들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이탈리아 미술의 보고이기도 하다.

바티칸 구경은 투어를 통하는것이 좋겠다는 생각에 한국에서부터 투어를 신청했다.
아침 일찍 OTTAVIANO 역에서 집합을 해야 하는데 트래픽이 심해 늦는 바람에 직접 바티칸으로 찾아겠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핸드폰 밧데리도 간당간당 하고, 시작부터 불안불안.

바티칸 박물관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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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근처의 상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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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박물관 티켓을 끊고 않으로 들어와보니 투어 일행들을 찾았고, 본격적인 투어에 앞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에 대한 배경 설명을 들었다. 실제로 보지도 않았는데 이야기를 듣는것 만으로도 감동이 밀려온다.

까페테리아에서 잠시 쉬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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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어 일행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어린 대학생들로 몇달동안 배낭여행중이라 했다. 부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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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칸 박물관은 바티칸 궁 몇몇 건물에 교황들이 모아 놓은 예술 작품을 전시한 곳이다.
바티칸 박물관은 1층과 2층으로 나뉜다. 1층에는 각종 그림들을 모아 놓은 회화 전시관, 피오 클레멘티노 미술관, 이집트 전시관, 키아라몬티 미술관, 시스티나 성당이 있다.
2층에는 에트루리아 전시관, 라파엘로의 방들이 있다.


바티칸 박물관의 회화관 피나코테카 Pinacot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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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관은 중세 시대부터 1800년대까지 이탈리아의 회화를 시대순으로 나열해 놓은 곳이다.

1호실
중세기 이전 작품들. 즉 지오토(Giotto 1267~1337) 이전의 작품들로서 주로 12~13세기 작품들이다. 나무 목판과 황금 바탕에 그렸다. 이때는 아직 인물 간의 비례, 원근법, 명암법이 없이 다만 중요한 인물은 중앙에, 그렇지 않으면 주변에 그리고 인물의 중요도에 따라 크기가 결정되던 시기다. 주로 문맹의 신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한 교육적인 도구로서 성인의 일생이나 종교적 교의를 그린것이 많다.

2호실
중세의 대표적인 도시 시에나에서 활동하던 화가들과 유명한 지오토의 그림이 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중세 미술의 기초가 시작됨을 알 수 있다. 2호실의 작품과 흡사한 곳이 시에나 미술관에 있다.

3호실
원근법이 발달하기 시작했다. 중세기 전형의 회화 양식이다.

4호실
베네치아 인근의 성당에서 가져온 프레스코화가 있는데 예전보다 훨씬 원근감이 있으며 인물의 세부 묘사가 더 사실적이다. 1400년대의 그림으로 로비고나 파도바, 우디네 근처의 박물관이나 미술관들에 이런 원색의 프레스코화의 전통이 잘 남아있다.

5호실
1400년대에는 유럽 회화에서 초기 르네상스(QuattroCento)시대에 해당.

6호실
정밀한 세부 묘사가 특징인데 14세기부터 조금씩 전개되기 시작한 르네상스의 기초가 된다.

7호실
과거 교황들이 좋아하던 움브리아 지역의 특색을 나타내는 그림들이다.
'라파엘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 '페루지노'의 그림이 이곳에 있다. 또한 라파엘로의 아버지인 '죠반니니 산티'의 작품이 있다.

8호실
라파엘로의 작품들이 있는 곳이다.
라파엘로는 1483년에 태어나 1520년에 죽은, 단명한 천재였다.
페루지노의 제자였다가 1504년 르네상스의 중심이던 피렌체로 가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의 영향을 받았다.

9호실
레오나르도 다 핀치(1452~1519)의 회화를 볼 수 있다.
곳곳마다 그의 그림, 조각, 건축, 발명품이 다 있다.

10호실
1500년대 베네치아의 대표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주로 티치아노(1490~1576)의 작품이 있다.

11호실
1500년대 중엽의 작품들이다. 조르지오 바사리, 루도비코 카라치, 카발리에르 다아르피노 등의 작품이 있다.
기존의 방들과는 달리 현대의 감성을 조금씩 느낄 수 있다.

12호실
1600년대 화풍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바로 바로크의 방이다.
'바로크'란 기존의 르네상스 시대의 화풍과는 달리 1600년부터 1750년까지 유행한 화풍으로 엄격한 종교적, 이성적 교의에서 벗어나려는 화풍을 뜻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은 용모단정한 모범생의 스타일이라면 바로크 시대의 예술은 인간적인 모습을 띈다.
바로크 양식의 작품들은 무정형적이며 좀  더 강렬한, 남성적인 힘을 느낄 수 있는 그림들이 많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화가로는 카라바조, 베르니니, 루벤스, 램브란트 등이 있다.

13, 14, 15, 16호실
17세기와 18세기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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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29, 09]Dinner in ROMA

Posted 2009. 12. 20. 23:29

Dinner in ROMA

이모부 친구 집에 급작스러운 저녁 초대.

이모부 친구는 전직 팬싱선수이자 세무사(?)로 가문 5대째 팬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집안 구석구석에는 팬싱이 관련 물건들이 가득.

 저녁 준비를 기다리는 동안 와인이 또 빠질 순 없지.

 

 

빨강옷이 집주인분이고 그 오른쪽에는 다른 안경쓴 친구분의 아들. 20살이고 경제학 전공이라는데, 파릇파릇 아직 사춘기 소년같아 보임 :)

 


식탁보가 19세 관람불가.

 

  저녁 요리는 오븐에 구운 파스타.


 

식사가 끝나고 본격적인 와인타임으로 접어들며 각종 치즈가 나왔다.

 

 끊임없는 토킹토킹.

이태리의 저녁식사는 몇번을 먹어보니 와인과 토론이 빠질 수 없는듯 하다.

예술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를 넘나들며 2시간이 후딱 지나감.

Actuario(아뚜아리오?) 로서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어보는 바람에 삐질삐질 설명도 하고.

설겆이도 열심히 하는 착한 아들내미들.

 

 

저녁을 마치고 작별인사.. 다시 보게 되겠지요.

 

즐거웠던 저녁식사 :)




 


[Nov 29, 09] ROMA-콜로세오 Colosseo

Posted 2009. 12. 19. 22:13

콜로세오 Colosseo - 로마 시민의 경기 관람장



콜로세오는 AD 72년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때 착공해서 그의 아들인 타투스 황제가 80년에 완성한 거대한 원형경기장이다.
티투스 황제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10만명의 노예를 데리고 그들을 이 콜로세오를 만드는 데 투입했다.
이 경기장은 당시 로마인들에게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했는데 검투사의 대결, 검투사와 야생 동물의 대결 등으로 인하여 바닥은 항상 피로 물들어 있었다.
콜로세오는 약 7만명 정도 인원을 수용 가능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들어갔다.
콜로세오의 터는 네로 황제가 만든 인공 호수인 '나우마키아'가 그 원형이다. 이곳에서 그는 모의 해전을 푤치기도 했는데, 바닷가의 물을 끌어들여 사용했다.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 Acro di Constantino


콜로세오를 나오자마자 보이는 큰 개선문.
이 개선문은 지금도 프랑스 파리나 혹은 우리 나라에서도 볼 수 있는 비슷한 개선문 형태 문들의 원형이다.
이 개선문은 콘스탄티누스가 정적이던 막센티우스와 전쟁을 하여 이기고 그 승전의 기념으로 세운 것으로, 315년에 착공되었는데 원래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방치되었던 것을 1804년에 복원한 것이다.


콜로세오 앞에서 맥주마시며.




포로로마노를 둘러본 뒤 계단을 올라가면 캄피돌리오 광장과 연결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상, 분수대


언덕을 오르자마자 말을 타고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상이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였는데, 과거 사람들이 기독교를 인정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마상으로 알고는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곤 했다.

정면의 분수대는 신문고 구실을 한 곳이다.
분수대에 누워 있는 신은 강의 신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억울한 일이나 알리고 싶은 일을 이곳에 말을 하든지, 적어 놓고 갔다고 한다.


산타마리아 인 아라코엘리 성당 Santa Maria in Aracoeli


하늘(Aracoeli) 위에 성당이 있다는 뜻.
이 성당은 원래 여신 주노의 신전이 있는 곳인데 1250년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에서 성당을 만들었다. 성당으로 가려면 총 124개의 계단을 지나야 하는데 1350년에 만든 것이며, 옆에 있는 캄피돌리오 광장보다 오래된 것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 Monumento a Vittorio Emanuele II


1870년 로마를 병합함으로써 476년 후 분열되었던 이탈리아를 하나로 만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기념하기 위해 건축한 건물로 1885년~1911년에 걸쳐 완공했다.
기마상 및의 부조는 로마의 상징이며 양쪽의 부조물들은 이름없는 로마 병사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것이다.
흰색의 대리석으로 뒤덮힌 건물 떄문에 주변의 로마 유적과 조화가 되지 않는다고 비난을 받기도 하는 곳이다.



베스타 신전 Tempio di Vesta


진실의 입이 있는 성당 앞에 있는 신전.
남성에게 행운의 신전이라고 한다.


진실의 입 Bocca della Verita

시간이 늦어 들어갈 수는 없었지만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진실의 입은 바다의 신인 '트리톤'의 얼굴을 담고 있다.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날이 저물어서야 도착하여 사진이 어둑어둑.
포로 로마노는 '로마인의 광장'이라는 뜻으로 말 그대로 로마인들이 모여 생활하고 살던 중심지이며 계속 발굴되어 가는 곳으로 사법, 정치, 종교 등의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곳이다.
포로(Foro)라는 말은 포럼(Forum), 즉 공공장소를 지칭한다. 주변으로 고대 로마의 중요한 건물들이 있었으나 4세기 말에 서고트 족의 침입으로 황폐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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